1. 내면의 소리
<본문>
무엇 때문에 부처 고타마는 일찍이 많고도 많은 시간들 중에 하필이면 그 시간에 보리수 아래에서 좌정하여 정각(正覺)을 얻을 수 있었던가? 그는 한 음성을 들었었다. 그 나무 밑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하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는 금욕, 제사, 목욕재계나 기도,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잠자는 것과 꿈꾸는 것,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었으며, 그는 내면의 소리에 따랐었다. 이처럼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감상>
올해, 내면의 소리를 따르며 마음의 평안과 새로운 성취를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감정과 직감, 그리고 직관이 단순 비이성적인 요소가 아니라, 피곤할 때 잠을 청하듯 자연스럽게 따라야 할 신호로써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였다. 사실,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기엔 표본이 부족하여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정각자(正覺者)라고 불리는 부처가 반드시 필요한 일로써 행하였다는데, 이보다 더 나은 레퍼런스가 있을까.
2. 정도보다는 일관인 걸까
<본문>
“난 당신의 종이 아니란 말이에요. 난 당신이 나를 때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사실 당신은 감히 나를 때릴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요. 나는 말이에요, 당신이 당신의 그 경건함과 당신의 그 관대함으로 끊임없이 나를 벌주려고 하고 나를 왜소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내가 당신처럼 되어야 한다고, 당신처럼 나도 그토록 경건하고, 그토록 부드럽고, 그토록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난 말이에요. 이걸 잘 들어 두세요, 나는 당신을 괴롭히는 일을 할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노상강도가 되든지 살인자가 되어서 지옥에나 갈 거란 말이에요. 난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은 절대로 내 아버지가 아니에요. 설령 당신이 열 번이나 내 어머니의 정부였다고 해도 말이에요.”
<감상>
훗날 부모가 되었을 때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인상 깊었던 단락이다.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정도(正道)란 무엇일까, 또 이해와 포용의 정도(程度)는. 아마 30대에 계속해서 마주할 것 같은 느낌. 불혹이 되기 전엔 알 수 있으려나.
3. 이해
<본문>
이제 그는 사람들을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았다. 예전보다 덜 총명하고 덜 오만스러워진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많은 관심을 지닌 눈길로 사람들을 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통상적인 부류의 여행자들, 그러니까 어린애 같은 인간들과 장사꾼들, 그리고 무사들과 부인네들을 건네다 줄 때면 예전과는 달리 그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생각과 통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였으며, 그 자신도 더불어 그런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꼈다. 비록 그가 완성의 경지에 가까이 가 있었고, 최근 마음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러한 어린애 같은 인간들이 자기의 형제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허영심, 탐욕이나 우스꽝스러운 일들을 이제 그는 웃음거리가 아니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 사랑스러운 일, 심지어는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梵)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지식인이자 사색가인 자기가 그들보다 앞선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미하고 사소한 그 한 가지란 것은 바로 그 의식, 즉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하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심지어 가끔씩 이러한 지식, 이러한 생각이 과연 그렇게 매우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혹시 생각하는 인간, 아니 생각하는 철부지인 자기의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은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는 일까지 있었다. 생각한다는 점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모든 점에서는 세속적인 간들이 현인인 자기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으며, 자기를 훨씬 능가할 때도 자주 있었다. 이는 짐승들도 불가피한 경우에는 끈질기고 확실한 행동을 취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는 경우가 많은 것과 흡사한 일이었다.
<감상>
어른에 관해 고민할 때, 이사님께서 해 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던 단락이다. 단순히 경청하고 입장 바꿔 생각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상대와 같은 것을 느끼고 경험해야만 참된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다는 말씀이, 윗글에서 싯다르타가 속세를 경험한 뒤에 얻은 시각과 꼭 닮아 인상적이었다.
4. 정의
<본문>
“해탈과 미덕이라는 것도, 윤회와 열반이라는 것도 순전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야, 고빈다.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감상>
‘말로 설명되는 모든 개념은 인간이 구분하고 정의해 놓은 것들일 뿐,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는 요즘의 생각과 일맥상통해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세상엔 절대적인 것, 정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신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본능만으로 살지 않기에, 잡다한 생각이 너무도 많기에. 그러므로, 사유하고 반추하며 경험 속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 과정, 혹은 행위는 영적 탐구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 모든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삶의 본질적인 과업이다.
끝으로, 노자의 <도덕경>에 이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라는 점과, 저자의 이전 작 <데미안>에 비해 훨씬 읽기 수월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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