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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미국 정착사

by yrohh 2023. 9. 24.

__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그리고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동급생>을 보면서, 유대인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지인과의 대화를 통해 흥미에 비해서 아는 바가 적다는 것을 깨닫고서, 조금 더 제대로 알아보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 관한 내용에 앞서 기록하고 싶은 내용으로는, 인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다 보니 지금까지 읽었던 어느 책들보다 많은 양의 플래그📑를 붙이게 되었다는 것. 좋았던 건 덕분에 처음으로, 초기 목적이었던 ‘유대인에 관한 부분'과 '인상적인 부분'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어휘나 사실', 이렇게 세 가지 성격으로 나눠 붙여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중, 글에는 '유대인에 관한 부분'을 중점으로 남기려고 한다.
 

유대인에 관한 부분📑 
 
유대인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정리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시간순에 따라 유대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생각되는 것만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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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유대인으로 추정되는)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대인 선원들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기독교 중심사회였던 당시, 유대인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기에 유독 떠돌이 상인이 많았고, 기독교도와 이슬람들이 서로의 지역에 오가지 못할 때, 이에 비교적 자유로운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지역을 오가며 해상무역을 하였다.
1654년 23명의 유대인들이 지금의 뉴욕인 뉴 암스테르담에 정착했다.
초기 유대인들은 대구잡이와 비버 모피 수출을 생업으로 하였다.
1655년 펜실베이니아두 번째 유대인촌이 들어섰다.
1658년 뉴욕 롱아일랜드와 가까운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 대구잡이 어항이 번성하여 네덜란드로부터 건너 온 유대인들의 세 번째 정착촌이 생겼다. 로저 윌리엄스 목사가 종교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해 주고 있는 곳이었기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들이 많았다.
대구 처리와 소금절임을 고도로 분업화하고 표준화하였고, 철저한 품질 관리와 서비스로 전국적인 유통을 장악하여 이를 기업화하였다. 이때 많은 이유로 부자가 된 유대인이 많이 생겨났다.
1664년 영국의 점령으로 뉴 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개칭되었고, 영국 총독 리차드 니콜슨에 의해 뉴욕은 과거 유럽과 달리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종교적 제약도 없는 곳이 되어, 유대인들은 과거에는 결코 지니지 못하였던 안전의 영속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영국·아프리카·서인도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을 경영하여 네덜란드를 압도하였다.
1768년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20명의 상인들이 미국 최초의 상공회의소를 뉴욕에 설립하였다.
1775년 영국의 조세가 심에짐에 따라 미국 식민지의 조지 워싱턴이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조직한 뒤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독립을 하게 된다.
1833년 독립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 독립이 필요한 상황에서 수력을 동력으로 한 최초의 방적공작을 설립한 (유대인으로 추정되는)사무엘 슬레이터가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 의해 미국 제조업의 아버지로 칭하게 되었다. 
1841년 캘리포이나 세크라멘토 근처 강에서 한 노동자가 사금을 발견했고, 이재에 밝은 유대인들이 서부로 말을 몰아 채광권을 선점하였다. 
1850년 서부에 늦게 도착한 독일계 유대인 청년 리바이 슈트라우스는 광산 옆에서 천막 장사를 하다, 대량의 천막을 주문한 사람이 부도가 나 해당 천으로 탄부의 바지를 만들었고,  1873년 특허가 승인되면서 현재의 리바이스 청바지가 탄생하였다.
19세기 중반 독일에서 온 부유한 금융 자본가들은 면화, 금광, 철도, 토지 등에 투자했고 당시에는 유곽처럼 취급받던 월스트리트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독일계 유대인은 모국 독일과 유럽 각지의 유대계 자본과의 연결 고리, 즉 중개인으로 활약했다. 
1873년 4년의 공황기에 모건을 비롯한 카네기와 록펠러는 보유 자본이 마른 기업들을 헐값에 인수한다.
*제이피 모건, 앤드류 카네기, 록펠러 모두 독일-유대계 혈통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금력을 활용하거나 도움을 받았다.
19세기 중후반 한창 상승기에 있던 미국은 일손이 부족해지자 유럽에서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민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이후 유대인의 본격적인 미국 이민 행렬이 진행되었다.
1910년 무렵 유대인의 미국 내 인구는 280만 명에 달했고, 1927년에는 동북부 유대인만 400만 명에 이르렀다.
유대인이 뉴욕의 의류산업을 주도하면서 현재의 기성복 시스템을 선보였고, 이는 대량생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로 의류산업의 생산 부문에서 유대인들이 차지하는 비주은 점점 낮아졌고, 생산 분야보다 '돈이 되는'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갔다. 이들의 후손은 훗날 뉴욕 패션계를 주름잡는다.
유대인들의 교육열 덕분에 의류산업에 종사하였던 유대인 자녀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였고, 엄청난 수의 의사·변호사·교수·금융가·사업가 등이 되어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2세들은 단기간에 미국 주류사회, 그것도 상류사회로 진입하였다.
1925년 유대인 공동체는 450만 명을 헤아렸다. 가장 영향력이 강한 세계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핵심이 되었고, 이미 미국의 기반 형성에 주도적으로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었다.

 
 
이와 별개로 책에서 인상깊었던 부분들 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보면, 먼저, 모피 무역이 대륙 개척의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고, 유대교와 청교도 간의 관계성을 다룬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직물공장 견학을 통해 파악한 직조기의 핵심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로 ‘방적, 직조, 염색을 일관된 공정으로 연결한 생산 시스템’을 개발한 프란시스 로웰의 이야기와 자동제분소를 견학한 뒤 초기 포드의 생산 시스템을 만든 헨리 포드의 이야기를 보면서 '견학'이라는 키워드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어떤 기술이나 사실을 '직접' 보고 배우는 '견학'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기에.
 
 
인상적인 부분도 많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아 읽는 당시엔 흥미로웠지만, 무엇을 리뷰에 다룰지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보니, 이번 리뷰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그래도 알고자 했던, '유대인이 미 대륙에 어떻게 정착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 에 대해서 정리해 남겼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고 다음 책 리뷰를 마저 작성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책에 관해 요약하자면, 책의 두께는 얇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핵심만 딱딱 적혀있어, 나와 같은 궁금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라 말하고 싶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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